
고전의 산책
이어진
1편~
(예전엔 미쳐 몰랐습니다.)
보름달이 지붕위에 커다란 등불처럼 떠 있습니다. 예전엔 미쳐 몰랐던 감상을 이제야 실감하는 정경 입니다.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 볼 줄을, 그 예전엔 정말 몰랐다는 소월의 심경 그대로 입니다. 지금 저 달이 그리움을 불러낼 줄을 나 역시 예전엔 미쳐 몰랐습니다.
무엇인가를 지니거나 소유하기 시작하면 사물을 바라보는 심상이 달라지는것 같습니다. 사랑을 알면서 보는 세상과 사랑을 잃고 난 후의 세상은 ,확연히
다르고 다릅니다. 인연의 경계를 지나 삶의 경계에서 이별은, 남은이의 운명을 재설정 하기도 합니다.
있던 것은 떠나거나 소멸하고, 부지불식간 전에 없던 무엇들..어떤 인연이 다가오기도 하더이다. 초승달이 보름달이 되었다가, 보름달이 그믐달이 되듯이, 삭망은 소멸과 생성의 이치다. 어느 것은 내게 알맞고 어느것은 내게 알맞지 않더이다.
같은 달도 시골 동산에 떠서, 남녘산 정상을 지나가 서산에 붉게 저물 때 아름답습니다. 바닷가에서 사는 사람들은, 달이 바다에서 떠서 ,바다를 지나 바다로
진다며 달빛에 반짝이는 윤슬의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도시의 달은 빌딩에 떠서 빌딩사이로 서운하게 집니다.
도시의 네온사인과 빌딩숲에 존재감없이 왔다가는만월은 귀한 정서를 상실합니다. 사람사이도 그렇습니다. 푸른 산빛이며 달빛에 함께 어울리는이가 있고,
도심에 예리한 발걸음이 어울리는이가 있을것입니다 육십줄 훌쩍 넘고보니~! 안분지족의 여유를 지닐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2편~
(도반을 그립니다.)
날씨가 추울거라는 예보를 듣고, 목도리를 할까 말까 하다가 그냥 나섰더니, 잘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매운 바람입니다. 코끝이 시리도록 추워 고개 숙인채 종종걸음으로 걸었습니다. 찬바람과 함께 지난 가을 낙엽몇개가 뒹굴어 다니는게 유난히 쓸쓸합니다. 낙엽의 길은 바람따라 정처가 없기 때문일까요!
이러한 당연한 자연의 흐름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전에 한 선배가 그랬습니다. 비가오면 비가 온다고...하늘이 푸르면푸르다고...무심까지 나눌 벗이 필요하다고~~
뉴스를 보거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이야기중에서 눈길이 가는 내용이있습니다. 마음에 걸리는 사연이 있습니다. 직간접 관련이 없는데도 기막히고 화나는 내용이 있습니다. 상관 있지만 해결해 줄 수 없는 이웃과 친인척의 哀.死가 있고 해결해줄 수 있지만, 관여하고 싶지 않은 몰지각도 있습니다. 사노라면 서로에 貴人인지 非人인지 인지할 필요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저런 심사를 진정 나누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고자 하는 말을 차마 다 할 수 없으니까 글을 써 봅니다. 글을 쓰면 마음속이 시원하게 풀어질 것 같지만 , 그것도 아니네요! 오히려 더 답답함을 느낍니다. 심정을 고스라니 그려 낼 언어묘사의 부족함입니다. 표현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나름 시원한 구절을 찾았다해도 적나라하게 쏟아내지 못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무 말과 아무글이든
선뜻 이해하고 공감해 줄 동지가 마땅치 않다는 점입니다. 어쩌겠습니까! 茶 한잔 마시며 넉두리하다 마는 것이지요..!
朋自遠方來! 어디선가 내 기다림처럼 나를 기다리는 벗을 그립니다.
~3편~
(우정 VS)
장대(竹)를 끼고 말 타듯이 놀던 어릴적 '죽마고우'는 가장 순박한 동무입니다. 이젠 국어사전 설명에서 만날듯 합니다. 동고동락 사이에는 자세한 말을 해도되고,
안 해도 되고, 네 것도 내 것인양 갖다 쓰고, 내가 하고 싶은대로, 너도 하고 싶은대로 해도, 허물없는게 친구아닙니까!
대표적 인물이 史記列傳에 관중(管仲)과 포숙아로 봅니다. 관중이 同業 이익금을 슬쩍슬쩍 더 가져가도.. 징집에 도망가 세상에 욕먹을때도...정적에 휘말려 죽게될 때.. 때마다 조력하고 구원한 포숙아입니다. 결국 친구를 명재상 管子로 등극시킨 우정의 고유명사 '관포지교'입니다.
우리에게도 오성과 한음이 있습니다. 명문가 자제들로 나이 차는 있으나 함께 공부하고, 함께 벼슬살이 하며 국난극복까지 해로한 우정의 아이콘입니다.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란지교..망년지교..수어지교처럼 친구에
가장큰 기대는 우정이고 우정의 가장 큰 기대는 신뢰라고 하겠습니다.
反하여,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은 친구 정진룡을 죽입니다. 각색된 부분은 있지만 실화라고 합니다. 함께 거지생활까지 하던 끈끈함이 ,이념에서 정적이된 것입니다. 영화 친구에서도 친구끼리 죽이고 잡아가고 사형까지 집행합니다. 친구는 서로의 거울이고, 제 2의 자신이란 말이 무색한 경우들입니다.
과거 고려적에도, 삼봉 정도전은 정몽주를, 김부식은 정지상을, 죽이거나 제거에 앞장 선 친구들의 예화입니다. 역사의 변곡점마다, 목숨을 지켜준 친구가 있고, 칼날을 등뒤에 꽂은 친구도 부지기수 입니다. 최근 동창에게 약간의 금전과 신뢰에 손상을 입어, 친구이야기를 꺼내보았습니다.
~4편~
(許交)
겨우내 廢蟄하며 글공부만 하다가, 이른 봄날 벗을
찾아 나선 선비의 日記입니다. 경쾌한 가짐으로 벗의집에
다다를 무렵, 저~ 앞에 밝고 단정한 차림으로 걸어오는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봄날 맑은 시냇물같이 시원하고
서늘한 눈빛이며 몸가짐이 멋집니다. 아~ 친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듭니다.
그 선비가 먼저 벗의 집으로 들어섭니다. 나도 뒤따라 갑니다. 내 벗이 반기며 말하기를, 앞에 온 그 선비도 벗이라며 소개합니다. 서로 통성명하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鶴이 옥피리를 부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 부분 과장이라도 좋습니다. 그렇게 벗의 벗이 새벗, 세벗이되어 시문을 즐기는 삼당시인이 되었답니다.
품격 있은 벗과 교류하는것은 모두의 선망일것입니다.
평생지기를 사귀고자 할 때, 나와 그의 학문과 인격을
고양시키는 관계가 될 수 있을지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그 정도는 아니라도, 잠시 스처지나갈 망정, 훗날 기억에 불쾌함은 남기지 않도록 서로가 마땅한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각설하고요~ 요즘은 우연히 밥먹다 말고 친구삼는 이들이 있습니다. 술자리나~혹은 차 한잔 하면서, 첫눈에 맘에든 사이,맘자리 상관없이 일단 사귀고 보자는 사람들 , 그냥 왠지 맘길이 꽂이는 사람, 혹은 전국구에 아무나 형제삼는 이들은 십중팔구 급체하고 속알이하며, 외로울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종이책과 오프라인에 익숙한 우리세대지만, SNS도 일상이라, 자투리 시간에 카스를 들여다봅니다. 마음풀이
글도 올려 봅니다. 오가는 답글속에 진솔한 품성을 유추합니다. 위상보다는, 부담없는 분들과 각별할것 없는 편안함을 지향하게 되는군요. 이렇게 세상의 여러면면을 배워갑니다.
近墨者黑
근묵자흑, 근주자적, 무엇을 가까이 하다보면 ,그와 같은색상 그 물질를 닮아간다는 말입니다. 비슷한 의미로
麻中之蓬 마중지봉이 있고, 당구풍월이 있습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 읊듯이 개짓는 소리도 주인을 닮는다네요. 우리가 뱃속에서부터 학습하는것도 부모의
감성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나오면 부모로부터 말을 익히고, 친구들을통해 학습과 교양을 보탭니다. 나날이 들어야할 말, 듣지 말아야할 말이 쏟아져나옵니다. 언어의 홍수와 오염을 걸러내고 압축해서 그대와 나의 소양에 유익만 골라 익히면 얼마나 좋을까요! 풍진 세파를 겪다보면 노년엔 다시 침묵을 배우야 한답니다.
어쩌다 나누는 선배와의 대화에서 말이 많아진것 같이 느껴집니다. 말수가 많아진것도 그렇지만 같은말을 반복합니다. 몹시 힘들었던 내용과 고마운 장면을 연속해서 그려냅니다. 모두 이 전에 한 말인데, 그 말을 하고 또 합니다. 알고도 하는 말인지..모르겠고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적절히 호응하지만 내심 염려스럽고, 나 또한 답습하지 않는지 성찰합니다.
아직도 힘든 기억이 남아 있다면, 그만큼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랍니다. 아무것도하지 않고 흘려보낸 시간은 마음에 기록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기 능력에 비해 기울인 정성이 지극했는데 무시되거나 소멸된 경우는 잊혀지지 않는고요... 갚을길 없는 은혜는 양심의 빚되어 되새김질만 한다는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좋은 기억은 그사람 그대로 그때의 추억으로 삼으면 되겠습니다.
좋지않은 기억은 그 사람 그대로 그 시간에 놓아두면 되겠습니다. 들으면 편안해지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말을 하는이가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지난 인연은 내 언행에 의해 고운 추억일 수 있고, 오염된 시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