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선명 선생의 성탄과 그 문중사적 배경
시조 무성공 문다성(2)
문중 족보인 『戊辰新譜(무진신보)』(1808)와 『庚午譜(경오보)』(1870), 『乙未譜(을미보)』(1955) 등은 그렇듯 시조 무성공의 연대를 신라 자비마립간 때로부터 기록했다. 그와 반면, 『辛亥譜(신해보)』(1731), 『丙辰譜(병진보)』(1736), 『甲子譜(갑자보)』(1824), 『壬戌譜(임술보)』(1983), 『乙亥譜(을해보)』(1995) 등은 신라 말 고려 초로 기록했다. 무성공의 연대가 나말여초라는 관점은 특히 그 관직에 주목해 후삼국 통일과 고려 개국 공신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실제로 각 족보에서 무성공과 부인의 관작은 신라조와 고려조의 것이 혼재된 형태로 전해져 왔다.
나말여초 관점은 무성공이 28세(또는, 18세)에 삼한벽상 이등공신이 됐고, 98세에 별세했다고 한다. 918년 고려 개국과 936년 삼한통합 후 삼한공신의 책정은 고려 왕실을 구심점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 지배 세력의 재편성을 의미하는데, 태조 이후 중앙집권화에 따라 이들은 점차 중앙정부 관료로 변신하게 된다.
이런 역사적 흐름으로 보아, 무성공은 서기 900년 전후 태생으로 20대 전후 고려 개국과 통일 전쟁에 참여한 인물이 된다. 영산강 유역 나주 지방에 오랜 토착 기반을 둔 막강한 세력 집단의 신진 수장으로서 신흥 국가 탄생에 이바지함으로써 조정으로부터 문 씨(文氏)로 새로운 토성을 지어 받았음을 알게 된다.
고려 개국 이전 무성공 문중은 일찍부터 명문의 향토 기반을 가진 세력이었음이 분명하다. 본래 그 유래는 영산강 유역에 정착한 고대 대륙 동이족 유력한 성씨에 닿아 있었고, 오랫동안 상실한 성씨를 이때 새롭게 받아 복원할 수 있었다.
비운의 왕조 선대 망명사는 의계로써 묻혔지만, 비로소 고려 개국과 함께 새로운 영광의 문중사를 쓸 수 있게 됐다. 앞서 신라조에 망명한 제1 무성공은 고려 초 개국공신 제2 무성공의 후세인 남평 문 씨 가계의 원조(元祖)로서, 같은 이름의 430년 전 다른 인물이다.
무성공의 아들 문탁(文倬)은 수 89세에 별세했는데, 문하시중 찬성사 상주국 영동정 태사 상부(尙父) 영평개국남으로 추증됐다. 시호로 무열(武烈)이 추서되고, 식읍 3,000호를 받았다. 여기서 ‘상부(尙父)’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투항한 후백제 시조 견훤이나 신라 제56대 마지막 왕인 경순왕 정도 인물에게 식읍과 함께 예우한 당시 최상의 명예 작위였다. 나주의 무성공과 무열공 등 문 씨 문중이 고려 개국에 이바지한 공도 그만큼 지대했음을 엿볼 수 있다.
남평 문 씨 문중은 2세 문탁 이후 12대 의계(疑系)를 포함하느냐 제외하느냐 하는 논쟁 끝에 1983년에 대종회에서 제외 결정을 했다. 문선명 참아버님은 12대 의계를 포함해서 시조로부터 49세손이다.
그렇다면, 무성공 탄강설화의 섭리사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참아버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조상을 가만히 살펴보니까 문 씨네는 사생아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족보를 캐 보게 되면, 신라 시대의 자비왕이 몽시에 이 나라에 특별한 아기가 났으니 찾으라는 명을 받아서, 남평에 있는 문암봉이라는 봉의 바위에서 우는 걸 찾아서 거기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섭리적으로 볼 때, 그것 참…. 화랑도 사상의 발주자가 누구냐 하면, 문 씨입니다. 지금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복잡한 사연들이 엉클어져 있습니다.” 『문선명선생말씀선집』, 제47집, 203, 1971.8.28, 청평수련소.
“서자 편입니다. 복귀는 타락한 해와로부터 계승된 직계 전통을 통해서는 지옥으로 통해 있지, 올라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박차고 반대 받아 올라가야 합니다.” 『문선명선생말씀선집』, 제451집, 25, 2004.5.25, 청해가든.
하나님 참혈통의 근본으로 강림한 「메시아」 혈족의 성스러운 기원이 어찌하여 하필 사생아(私生兒)로부터였을까? 인류 시조 아담과 해와는 사탄의 거짓 사랑의 유혹에 의해 하나님의 참사랑 중심한 본연의 혈통(血統)을 빼앗겨 거짓 혈통의 인류를 낳았다. 따라서 하나님 복귀섭리역사의 근본 의의는 사탄세계로부터 하나님 편의 선한 혈통을 빼앗아 오는 싸움의 역사였다. 이 과정에서 「메시아」 예수님도 사생아와 같은 입장에서 혈통을 복귀한 기반 위에 탄생했다. 그 배후에는 믿음의 여성들이 헌신한 기반을 통해 남모르게 하나님 편의 혈통을 빼앗아 오는 섭리적인 혈통복귀의 깊은 뜻이 개재돼 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 모세노정에 보면, 애굽의 바로가 히브리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살해할 때, 모세의 생모는 모세 출생 후 석 달간 숨겨 길렀다. 그러다가 하는 수 없이 상자에 뉘어 나일강 갈대숲에 띄워놓음으로써 결국 바로 공주의 손에 들어가게 했다. 이때 모세의 생모는 유모를 자처해 궁중으로 들어가 40년간 내밀하게 모세를 선민의 지도자로 양육했다. 이렇듯 남평 장자연 문암 위의 석함에 놓인 무성공의 탄강과 신라 왕실 입성은 모세의 기적적 구출과 바로 왕실 입양에 나타난 섭리와도 그 성격을 같이하고 있다.
그리고 무성공 탄강지의 ‘문암(文巖)’은 진리, 즉 말씀의 실체를 상징하는 바위로 해석할 수 있다.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복귀노정 중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십계명(十誡命)이 불로 새겨진 두 석판(石板)은 장차 말씀의 완성 실체로 오실 예수님과 성신, 즉 참부모를 상징했다.
문암각과 시조 설단
그 뒤 1,600년 만에 예수님이 「메시아」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찾아왔으나 불신 당하게 되자, 광야에 나가 40일 금식을 하면서 사탄으로부터 3대 시험을 받았다. 그때 사탄은 첫째 시험에서 예수님에게 “이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요구했고,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대응했다. 이로써 예수님은 말씀의 완성 실체로 온 자신을 복귀하는 승리의 조건을 세웠던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 복귀섭리의 중심 종족인 참아버님 혈족의 시조 탄강설화에서, 불이 솟고 붉은빛이 모인 큰 바위 위의 석함에 붉은색 글씨의 ‘글월 문(文)’ 자가 새겨졌다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반석과 석판, 그리고 바위와 석함으로 상징된 말씀의 완성 실체가 복귀된 참혈통의 근원으로서 장차 그 혈족에 오신다는 섭리적 예시가 아닐 수 없다.
참아버님은 말씀 중에, ‘文’ 자는 그 획을 달리해 쓰면 ‘아비 부(父)’도 되고 ‘하늘 천(天)’도 되며, 제상에 제물을 받쳐 올리는 형상이라고 했다. 이는 남평 문 씨가 바로 하나님이 택해 세운 혈족으로서, 인류의 「메시아」 참부모를 모시고 새 말씀을 받드는 천주적 제사장 문중의 사명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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