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글(수필 ·꽁트·유모어)

황혼 들녘에서

청산 /임흥윤 2025. 4. 11. 16:14



황혼 들녘에서
임흥윤

젊은 날,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나는 자주 멈춰 섰다.
그때마다 나는 묻고 또 물었다.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것인가.
무엇을 좇아야 참된 삶일까.

어느 해 여름,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결심으로
두 눈썹까지 밀고 방 안에 틀어박힌 적이 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옮기고, 사유의 조각을 모으며
나는 마치 무언가를 이루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무언가 거룩하고 순전한 삶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다.
어깨 한쪽에 새겨진 작은 글자 하나처럼,
지워지지 않은 기억은 삶의 문턱마다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제 황혼의 들녘에 다다라 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길에는 바람에 흩날린 먼지 같은 실수들이 남아 있다.
어쩌면 그 먼지들이 오늘의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마음에 남긴 상처는 참회로만 지워지지 않기에
가끔은 조용한 저녁, 고개를 숙이고 마음으로 사과를 건넨다.

요즘 나는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헛되이 흘려보낸 날들, 의미를 찾지 못한 하루들이 문득 떠오를 때면
그 모든 시간이 낭비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나의 마음은 말한다.
그날의 방황과 침묵, 멈춤 또한 삶의 한 장면이었다고.

가끔은 오래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젊은 날의 내가 조용히 내게 묻는다.
“지금의 너는, 시간을 잘 쓰고 있느냐”고.
그 물음 앞에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잠시 바람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요즘 내 책상 한 켠에는 말라가는 꽃 한 송이가 놓여 있다.
그 옆엔 손글씨로 써 내려간 카드가 있다.
“아버지, 긴 시간 고생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 삼남매 드림.”

그 짧은 문장이 마음을 쓸어내린다.
세 자녀는 이제 저마다의 삶을 꾸리고,
손주들은 알콩달콩 웃음 속에 자라난다.
이따금 통화 너머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세상이 갑자기 따뜻해지는 순간이 있다.

며칠 후면 가족들과 함께 떠날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강원도의 봄은 어떨까.
새벽 안개 속 들판을 함께 걷고,
노을빛 머금은 바다를 바라보며 조용히 이야기 나눌 그 시간이
요즘의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어느새 삶은 욕망을 좇는 일이 아니라,
작은 따뜻함을 품는 일이 되었다.
부드러운 미소 하나, 다정한 말 한마디가
때론 가장 큰 위로이자 의미가 되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된다.

이따금, 마주 앉은 말 없는 저녁에서
나는 생각한다.
어떻게 살아야 후회하지 않을까,
아니, 어떻게 살아야 조금 더 따뜻할 수 있을까.
그 물음이 멀지 않은 내일로 이끄는 등불이 되어준다.

이제 나는 황혼 들녘에 서 있다.
햇살은 조금 기울었지만, 아직은 따뜻하다.
남은 걸음들이 누군가에게 작은 볕이 되기를,
그저 그런 소망 하나 품고 천천히 걸어간다.

2025년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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