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그리고 나
수필공방 선생님께서 수박 주제로 수필을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시며 수박 하면 처음 떠오른 생각을 말해보라 청강생들에게 여쭤보신다 아내는 아들이 생각난다 말한다 무전여행 때 윈두막 밑에 버려진 수박껍질에 붙어있던 하얀 속살로 허기진 배를 채웠던 일이 생각 속에 머문다. 비상식량으로 미숫가루는 집에서 장만해 왔어도 미숫가루만으로는 영양보충하기엔 부족할듯싶어 쌀 3되를 볼펜 판 수익금으로 사고도 돈이 조금 남았기에 풀빵을 서서 친구에게 주니 얼마나 굶주렸으면 함께 먹자는 말도 없이 한입 가득 허겁지겁 먹기에 바쁘다 " 자식 많이 배고 팠구나! 힘든 무전여행 함께 하자 해서 아무튼 미안하고 고마워!" 어제저녁부터 하루 종일 쫄쫄 굶고 허겁지겁 식사 대용으로 풀빵을 먹는 친구 얼굴을 쳐다보니 전쟁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빈빈촌 아이들의 울움소리가 환청 들려오는 듯하여 창희 친구에게 눈에 맺힌 눈물 보여 주기 싫어 억지웃음 지으며 하모니카를 불며 더위에 지친 몸을 끌고 걷고 걸었다. 윈두막 그늘 아래에서 우리는 ‘보물’을 발견했다. 누군가 먹다 버린 수박 껍질. 허연 속살이 몇 가닥 붙어 있었고, 파리 한두 마리가 맴돌고 있었다. 수박껍질을 수치보다는 살아야 한다는 생존의 본능으로 허겁지겁 먹던 무전여행 추억을 회상하니 선생님의 말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창문에 비췬 풍경이 온통 수박 밭이다
그로부터 몇 해 뒤, 누나네 집을 처음으로 방문했던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어설프지만 뭔가 멋을 부려 보이고 싶던 시절. 시장에서 큼지막한 수박 하나를 고르며 나는 나름의 자부심을 느끼며. ‘가족을 위한 선물’이라는 생각에기분은 좋았다. 누나와 형부가 반갑게 맞아주었고, 나는 자랑스럽게 수박을 내밀었다. 그런데 잘라낸 단면은 새하에였다. 익지 않아 당도는커녕 씁쓸한 맛까지 났다. 누나가 민망함을 웃음으로 덮었지만, 나는 입 안이 다 말라붙는 것 같았다. 그날의 수박은 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수박 덕분에 가족의 따뜻함과, 부끄러움마저 감싸 안는 사랑을 알게 되었다 수박은 단순한 과일이 아니었다. 가족이 함께 웃는 풍경, 더위를 잊게 해주는 자연의 선물, 그리고 그 시절 우리가 얼마나 순수하고 소박했는지를 기억하게 해주는 매개체였다. 도시의 에어컨 바람보다 시골 마당에서 수박을 먹으며 부채질하던 할머니 손길이 더 그리운 요즘이다. 이제는 마트에서 손쉽게 반으로 잘린 수박을 사오만, 어릴 적 그 통통하고 단단한 껍질, 무겁게 들고 오던 아버지의 팔, 하얗게 웃던 엄마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름밤 별빛 아래 수박을 먹던 기억은 시간의 껍질 속에서도 여전히 달콤하다. 누나댁 방문 때 시장에서 사들고 간 익지 않은 속살이 하얀 수박이어서 부끄러웠던 추억이 수박이야기가 나오면 생상하게 떠오른다 붉은 속살 속 검은 씨를 골라 뱉으며, 누가 더 멀리 씨를 튀기나 시합하던 유년의 오후. 한 입 베어 물면 시원한 달콤함이 혀를 감싸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마저 잊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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