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소리

홍일식 선생님을 추모하며/손대오 박사

청산 /임흥윤 2025. 10. 11. 19:23

  



홍일식 선생님을 추모하며
                                         손대오 (전 세계일보 회장, 선문대 부총장)

사람의 일생에 인연으로 맺어지는 일이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내가 고려대학교와 홍일식 선생님을 만나고 사제(師弟)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운명적인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적이 많았습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곁에 안 계시니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떠나신 지 벌써 2년이 되고 보니 마음속의 빈자리를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어 황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내가 홍일식 선생님의 존함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재학 때였습니다. 당시 나는 부산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존함을 알게 된 사연인 적은 이렇습니다. 1963년 고3, 2학기 시절 모두가 대입시험 준비하기에 정신없이 바쁜 시절 나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행운아(?)였습니다. 나는 그때 이미 고려대학교 안암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사가 넉넉지 못한 집안의 학생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유학을 하기란 쉽지 않은 시절, 나는 담임선생님의 안내와 인도로 고려대학교의 안암장학생 선발에 응시하여 일찌감치 부모님의 걱정을 들어 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4년간 풀 스칼라십(Full Scholarship)을 베풀어준 모교에 진심으로 감사를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도서관 서가에서 「육당연구」(1959, 저자 홍일식, 일신사)라는 책을 발견하여 흥미롭게 읽으면서 저자인 홍일식 선생님이 참 젊은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나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안암장학생으로서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게 당시로는 드문 일이어서 주변으로부터 관심을 끌게 된 모양이었습니다. 그것도 전교 수석합격자였으니까 국어국문학과 교수님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가지셨던 게 아닌가 합니다. 당시의 총장님은 유진오 선생이셨고 국문학과의 최고참  교수님은 구자균 선생이셨습니다. 유진오 총장께서 저를 총장실로 부르셔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시다가 안암장학생으로서 수석합격자가 법학과나 경영학과를 안 가고 왜 국어국문학과에 입학을 했느냐?를 물으셨습니다. 나는 우수한 학생들이 무관심하고 외면하는 분야이기에 그 렇게 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더니 총장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구자균 선생님께서 저를 선생의 댁(학교앞 제기동)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날 구자균 선생님 댁에서 홍일식 선생님을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홍일식 선생님은 그때 대학원에 적을 두시고 모교인 양정고등학교 교사로 계시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구자균 선생님께서 저를 홍일식 선생님에게 소개하시면서 “손 군을 잘 지도하라”고 당부를 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홍일식 선생님은 구자균 선생님의 소개로 육당 최남선을 뵙게 되어 학부 학생으로 육당선생을 사사(師事)하여 후일 「육당연구」를 출간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던 것입니다. 내가 대학 일학년 학년 말인 1964년 12월, 구자균 선생님이 작고하셨습니다. 그 후 수년간 홍일식 선생님과는 인연의 끈이 잘 닿지 않는 나날이 나에게 벌어졌고 선생님도 여러 일과와 과업을 수행하시느라 나와의 만남이 쉽지 않았지만 뒤로는 늘 저의 행보를 지켜보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1972년 선생님이 모교 국문학과의 전임으로 발령이 된 후에 나와의 만남이 이어졌습니다. 나는 그사이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친 상태였지만, 나의 인생행로가 세칭 통일교 창시자 문선명 선생의 제자로 투신하게 되어 학문의 길에 대한 나의 열정이 예전 같지 않았던 때였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학문적 열심이 문선명 선생이 제시하는 ‘통일원리’의 비전에 대한 종교적 열정에 자리를 내주고 난 뒤였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선생님과 다시 만남을 계기로 늦었지만 나의 종교적 열정과 학문적 관심을 동시에 다룰 수 있었던 “한국 고전소설의 의식지향 연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은 선생님도 모교에 전임 발령을 받으시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있으셨던 기간이셨습니다. 민연의 총간사로 시무하면서 조지훈 선생님이 작고하시자 그 유지를 받들어 『한국문화사대계』 전7권 11책을 완간(1972년)하고, 모교 전임발령을 받고 1978년에 민연 소장을 맡으신 후, 이어서 『한국현대문화사대계』 전5권을 발간(1980년)하고, 『한국민속대관』 전6권을 완간(1982년)하는 등 선생님 생애 중 가장 활동을 광폭으로 하셨을 것입니다. 민연 소장에 취임하시면서 “미래는 언제나 준비하는 사람의 몫”이라는 소신으로, ‘중한대사전’과 ‘한국민속대관’편찬 및 문화영토 연구를 위한 ‘문화영토연구실’을 출범시키셨던 것입니다. 내가 박사과정 지도를 받던 기간도 이 기간이라 선생님을 자주 뵙고 선생님이 열정적으로 추진하시는 프로젝트를 지켜보면서 많은 영감을 받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선생님을 추모하는 이 글에서 언급할 여러 가지 항목들이 많지만, 선생님이 문선몀 총재와 저를 거명하면서 선생님의 회고록 「오직 고려대학교」에도 자세히 언급하신 ‘중한대사전’ 편찬 지원 건에 대하여는 당사자인 제가 증언을 올리는 것이 서거하신 두 분의 크신 스승님에 대한 저의 마땅한 책무가 아닌가 합니다. 회고록 「오직 고려대학교」 181쪽과 218쪽에 선생님이 남겨놓으신 기록을 옮깁니다.
“이 무렵 특히 오랫동안 온갖 고초 속에 중국어사전(대‧중‧소 사전:《중한대사전》 30만 어휘,《중한사전》 18만 어휘, 《현대중한사전》 10만 어휘)을 편찬하느라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크게 협조를 해준 통일교 재단의 문선명文鮮明 총재의 용단은 참으로 고마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계 최대인 30만 단어 이상의 《중한대사전》편찬 자체가 엄청난 기획사업인 데다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문 총재가 민연이 발간한 《한국민속대관》 1천 질을 현금 2억 원으로 구입하여 전 세계에 보급함으로써 한국문화를 널리 알림과 동시에 우리 민연에는 《중한대사전》편찬에 꼭 필요했던 재원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181쪽)
“내가 박사과정을 지도했던 손대오孫大旿 교우는 일찍이 유진오 총장시절, 초기 안암장학생 선발시험에 수석 합격한 수재로서 국문학과를 지원한 학생이었다. 이미 학부 시절에 통일교회 창시자 문선명 교주의 손꼽히는 제자가 되었다. 그 손대오 교우에게 내가 ”자네 그렇게 통일교 자랑만 하지 말고, 이 《한국민속대관》 영문 요약문도 수록되어 있으니 그 쪽 젊은이들, 특히 뉴욕 거리에서 꽃과 양초를 판다는 미국 대학생들을 통해 이 책을 팔아 줄 수 없겠나?라고 했더니 “우리 선생님을 한번 직접 만나 보시지요. 아버지 허락이 나면 몇 천 질도 문제 없습니다” 하는 것이었다.(218쪽)
218쪽과 관련되는 얘기입니다만, 1980년 12월 선생님과 나는 《한국민속대관》보급을 위해 그때까지 발간된 1, 2권을 둘러메고 미국의 주요도시 재미 교포단체 순방을 떠났습니다. 순방을 떠나기 수일 전에 민연을 방문하신 김상협 총장께서 저에게 미국 순방에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홍소장을 잘 도와 성공적인 순방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씀했었지요. 재미교포를 만나는 일정은 동부의 로스엔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시카고, 뉴욕으로 향했습니다. 뉴욕에서 저의 주선으로 문 총재님을 만나는 일정이 정해졌을 때, 문 총재님께 드릴 민속대관 1, 2권에 “文波萬里”라는 제자題字를 쓰시고 준비해 오신 마고자와 진곤색 두루마기를 갖춰 입고 나셨습니다. 이 부분도 회고록 219쪽에 소상히 기록해 두셨습니다. 한국을 종주국으로 하는 세계적인 종교를 창시한 분, 제가 생애를 바쳐 모셔온 문선명 선생님과의 만남에 격조있는 격식을 차리시는 것에 저는 감사했습니다. 그날의 만남이 큰 성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날의 만남과 그 결과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선생님의 회고록 《오직 고려대학교》에 문선명 선생, 《한국민속대관》 1천질 구입-〈중한대사전〉 제작비 지원 의미로-라는 항목으로 자세히 기록으로 남겨두셨습니다. 이 건을 가지고 세상의 호사가들이 별 소문을 내면서 선생님을 비방하던 자들에게 당당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김상협 총장님도 저에게 이 일을 잘 도와 달라고 당부를 받고 문총재와 홍소장님의 만남을 주선한 사람으로서 선생님의 이 회고록 기록을 보면서 다시 한번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신 것에 감사를 올립니다.
그 후 1986년 3월, 선생님이 민연에 개설한 한국어‧문화연수부를 출범할 때, 제가 문총재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본의 통일교인 청년들 4천 명에게 한국어를 연수하도록 주선하였습니다. 문총재님의 가르침을 받는 세계 각국의 신도들은 종주국 한국의 언어와 문화는 모두가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주창하신 ‘문화영토론’의 현장을 저는 세계무대의 현실에서 실천하던 사람으로서 한국어를 외국인들에게 보급하는 일은 나의 일처럼 보람있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 때 교실이 미비되어 정릉에 있는 고려중·고교의 교실을 빌려 수업을 했던 일도 기억에 새롭습니다.  드리고 싶은 여러 사연들이 많지만 이 정도로 마감하는 게 순서에 맞다고 느껴집니다.
운명적으로 만난 두 분의 큰 스승, 문화영토론을 주창하신 고려대학교 홍일식 총장님! 한국을 종주국으로 하는 세계 통일교회를 창시하신 문선명 총재님! 나는 이 두 분 큰 스승의 가르침과 인도로 나의 생애를 보람있게 보내게 되었다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한 분은 학문적 스승으로, 다른 한 분은 종교-신앙적 스승으로 모시고 그 두 분간의 상호교류와 이해가 문화영토라는 키워드로 확장 심화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제 삶이 보람과 충만으로 감사하게 되었음을 선생님께 고백하게 됩니다.
이제 이글을 맺는말로 선생님께서 2022년 6월에 펴내신 《대한민국 이야기》12장 문화영토 시대: 3.한국문화의 세계화 4)종교를 통해 본 문화 대국의 자질(333~336쪽)에 나와 있는 결론 부분을 인용함으로써 선생님을 여의고 외롭게 남은 제자의 추모의 정을 올려드리고 싶습니다.받아 주실 줄 믿습니다.
“~(前略) 우리 역사 속에서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난날 삼국 중 가장 후진국이었던 신라가 어떻게 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강대한 대륙국가였던 고구려와 풍요롭고 찬란했던 백제가 당시 보편주의로서의 불교 그것에만 안주하고 있을 때, 신라만은 그 불교사상에다가 우리의 토속적인 현묘지도(玄妙之道)와 국선(國仙), 풍류지도(風流之道)를 접목시켜 한 단계 높은 사상과 이념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사상을 대승불교(大乘佛敎)로, 호국불교(護國佛敎)로, 다시 세속오계(世俗五戒)로 발전시켜 신라 백성의 정신적 지주가 되게 하였고, 이로써 교육받고 훈련된 청소년들의 역량이 화랑도 정신으로 승화 확산되어 마침내 통일성업을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보는 바로는 오늘날 이 땅에 기독교 문명이 들어온지 200여 년, 모든 서방세계가 기독교사상 그것에만 안주하고 있을 때, 이 보편적 가치에 만족하지 않고 동양의 사상과 한국적 가치를 접목시켜 천도에 입각한 새로운 보편적 사상 가치를 창조해낸 것이 바로 문선명 선생의 통일 사상이 아닌가 감히 추론해 봅니다.
21세기 우리 한국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도덕적 정당성 위에 서서 문화대국, 사상대국, 이념대국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선명 선생의 통일사상이 우리 문화와 인류역사에 과연 어떤 역할을 할 것이며, 얼마만한 영향을 발휘할 것인지는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인류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천상에 계실 선생님! 부디 평강하시옵고 땅 위에 남아 갈길 몰라 헤매며 서로가 갈등하며 자해소동을 벌이는 인류에게 문화의 힘으로 평화와 번창의 밝은 길을 비추어 주는 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