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이어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 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밴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박인환 ( 1926~ 1956 향년 30) 강원도 인제 출신
밀양(密陽)朴氏 1939년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명신중학교를 마칩니다.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15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였습니다. 대표작으로 '木馬와 淑女', '세월이 가면'
으로 유명합니다.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에서 ‘그 사람’은 특정한 누구라기보다 각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젊은 날의 감정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름은 잊혔으나 눈동자와 입술은 가슴에 남아 있다는 고백은,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흔적이라 하겠습니다.
한밤 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시 낭송과 이사도라 던컨의 배경 음악을 떠올리면, 예전의 감수성이 자연스레 겹쳐집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 ‘목마와 숙녀’가 전하던 울림은, 그냥 마음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은유의 의미를 짚어내지 못해도, 음악과 낭송만으로도 충분히 슬프고 아름답던 시절입니다.
강원도 인제를 지나던 중 박인환 문학관을 찾았을 때, 단정한 바바리코트는 그의 시에서 느껴지던 도시적 감수성과 묘하게 닮아 있었습니다. 외모와 태도를 중시했던 시인의 처세 철학은, 혼란한 시대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키려 했던 한 시인의 고독을 전해 주는 듯했습니다.
서른이라는 짧은 생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고향을 일찍 떠나야 했던 소년 시절, 학업의 중단과 방황, 펼치지 못한 시적 세계가 겹쳐지며 아쉬움이 깊어졌습니다. 갈대만 무성한 인제의 들판 “내 고향은 갈대뿐인 토지”라는 시구가 더 이상 비유가 아닌 현실의 풍경으로 다가옵니다.
박인환선생의 문학은 읽을 때마다 추억을 불러내는 매력이 있습니다. 이번 문학 탐방은 시인의 삶과 시를 따라가는 여정이었지만, 내 젊은 날 감수성을 되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는 내안에 무엇이.. 무엇인지, 내게 묻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