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소리

팬이 침묵 앞에서 무력한 이유

청산 /임흥윤 2026. 2. 25. 13:06


펜이 침묵 앞에서 무력한 이유
                            이재영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우리는 오랫동안 진리처럼 믿어왔다. 사상과 언어가 역사를 움직이고, 글이 결국 권력을 넘어선다고 배워왔다. 나 역시 그 믿음으로 신앙칼럼과 논단을 써왔다. 통일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벗어났는지,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지를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기득권 지도자들에게 그 글은 소귀에 경 읽기에 불과했다. 읽지 않거나, 읽어도 반응하지 않거나, 반응하더라도 변하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회의가 밀려온다. 과연 펜은 강한가? 아니면 필자가 순진하게 이상을 믿고 있었던 것인가?

그러나 냉정히 돌아보면, 펜이 약해진 것이 아니다. 권력이 귀를 닫았을 뿐이다. 닫힌 구조 안에서는 어떤 말도 울림을 만들기 어렵다. 절대 순종과 침묵을 미덕으로 삼는 문화 속에서는 질문 자체가 불온한 것이 된다. 비판은 곧 반역으로 간주하고, 문제 제기는 곧 신앙 부족으로 해석된다. 이런 구조에서는 아무리 옳은 말도 힘을 갖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요즈음 생각한다. 글만으로는 부족하다. 행동이 필요하다. 개혁을 위해서는 세력이 필요하다.

역사는 언제나 사상과 세력이 만날 때 움직였다. 종교개혁도 한 사람의 문제 제기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운동이 된 것은 동의하는 사람들의 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감이 모이고,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침묵하던 사람들이 입을 열었을 때 비로소 구조가 흔들렸다. 혼자의 외침은 메아리에 그칠 수 있지만, 다수의 양심은 시대를 바꾼다.

지금 통일교의 위기는 외부의 박해 때문이 아니다. 본질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교리가 본질에서 멀어졌고, 조직 운영이 본질에서 멀어졌고, 지도력 또한 본질에서 멀어졌다. 본질은 하나님 중심, 참부모의 참사랑 중심, 양심 중심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권력 중심, 혈연 중심, 조직 유지 중심으로 흐르고 있다면, 이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구조는 글로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글의 무력함에 회의가 온다. 구조는 힘의 균형이 바뀔 때 변한다. 그렇다고 해서 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숫자의 힘이 아니라 정당성의 힘이다. 침묵하던 다수의 양심이 서로를 확인할 때, 그 자체가 세력이 된다. 두려움 때문에 말하지 못했던 이들이 연결될 때, 변화의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나 행동은 감정의 폭발이어서는 안 된다. 행동은 철학 위에 서야 한다. 분노는 순간을 만들지만, 철학은 방향을 만든다. 우리는 무엇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회복하려는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목표는 권력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신앙의 본질을 되찾자는 것이다.

펜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러나 펜이 단지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제는 공감하는 이들을 연결하고, 작은 모임을 만들고, 공개적인 토론의 장을 열고, 개혁의 선언을 함께 준비해야 한다. 과거 종교 개혁자들의 그랬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는 먼저 참회 기도 소그룹을 만들었다. 이 기도회가 개혁의 불씨를 붙이게 된 것이다. 글이 불씨가 되었다면 불씨가 그 글이 숱이 될 때까지 희생이 필요하다.

나는 여전히 펜의 힘을 믿는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펜은 혼자일 때 강하지 않다. 펜이 사람과 연결될 때, 사상이 공동체가 될 때, 그때 비로소 칼보다 강해진다. 개혁은 한 사람의 용기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양심이 만날 때 시작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침묵이 아니라, 더 많은 연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