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소리/구재익 시인방

진리란 삶과 생애의 산물이다

청산 /임흥윤 2026. 3. 17. 16:56

진리란 삶과 생애의 산물이다
                    구재익

글씨나 어휘가 진리를 만드는게 아니다. 성인의 삶이 진리 자체요, 생애가 진리를 만든다.
아버님의 이북노정이 진리를 생산하는 말씀공장이 되었고 섭리로 이끄신 하나 하나의 사건이 진리를 생산한 결과물이 되었다.
참부모님의 삶이 정분합작용의 모델이 되었고, 수수작용의 표본이 되었으며, 사위기대의 전형이 되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원리적 삶의 진리를  확증하셨다
보령 어리신 춘추에 삼팔선 북쪽 군인의 살벌한 총뿌리가 스르르 내려가게 만든 사건은 감동감화하시는 성령역사 이심을 증거하셨고, 아버님을 만나시고 두 분께서 함께 지어내신 섭리자체가 진리를 제조하는 서사가 되게하신 것이다.
참부모님의 삶과 생애를 통하여 깊은 깨달음을 얻은 우리가 두분의 자취를 따르는 이유인 것이다.

지금처럼교회가 어려운 시기라고 생각 될 때는 위기를 극복하자는 무언의 일체감이 절대로 필요하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어머님의 안위만 걱정하고 속히 자유로운 환경이 되기를 위해 정성을 투입하고 심혈을 기우려야할 때다.
우선이 아닌 일로 정성의 기준을 망가트리면 안된다. 모두가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기 때문이지만 우리 내부의 사소한 문제는 참부모님 양위분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해야한다.
부처님이 아무리 좋은 말씀을 했다해도 삶이 억망이면 누가그를 진리의 화신체라고 존경하겠는가?
도마위에 생선이 파닥거리면 정수리부터 깨져나간다.
지금은 신령함으로 베옷을 입고 제삿상에 올려진 제물같아야 한다.
그저 어머님을 구해드리지 못하는 죄송스러움으로 자신의 무능을 탓할 뿐이다.

아직도 우리는 성서에서 말하는 원죄론에 천착하는가? 원죄가 없다한들 그게 무슨 대수며 원죄가 있다한들 그것이 무슨 거리낌이 되겠는가?
원죄없이 태어났어도 삶이 개차반이면 누가 그를 존경하고 따르겠는가?
비록 원죄를 짊어진 인생이라도 원죄의 무개보다 더 무거운 세상죄를 지고 승리하신 분이라면 원죄가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원죄에 대한 논쟁은 한낱 주안상없는 안줏거리같은 허무한 논쟁에 불과하다.
내가 세상을 살다보니 모든 것은 말장난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세상에 누가 감히 어머님께 돌팔매를 던질 수 있으랴?
하루하루의 삶이 뼈가 저리도록 아프셨던 어머님의 속사정을 조금은 알기에 어머님의 생애가 더욱 거룩하고 아름답게 여겨진다.
자식들이 하나같이 무너지고 믿었던 도끼마저 발등을 찍고있는데 그런 분에게 한가한 이야기로 심기가 불편함을 조장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참부모님을 향한 존중감은 일천%가 넘지만 좋은 것은 오래오래 기억하고 덜좋은 것은 그때그때 지워버리면 된다. 묻어버리면 무드힐일도 먼지까지 털어가며 다시 꺼내든다면 제자의 도리가 아니다.
심판자는 하나님 한분으로 족하다.
이러다가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 논쟁이 되겠네. 결국 논쟁으로 교회를 발전시키고 세상을 구원하는게 아니다.
묵묵히 사랑과 진리를 실천한 신앙속에서 세상이 변하고 교회가 발전했다.
세상은 사랑을 준만큼 변화되었고 교회는 세상앞에 봉사한 만큼 발전하였다.

세계는 지금 한국문화에 열광한다. 한국의 흥을 돋구는 문화는 서릿발같은 한을 극복하고 뛰어넘을때 한이 흥으로 승화되어 나타난 문화란 점에 유념해야한다.
한을 승화시켜 흥을 이끌어낸 종교문화(무속,신내림,기타)의 절정에 용서와 포용이라는 주제가 있기에 종교는 살아나서 흥하고 발전하게 된다.
용서하고 하나되라, 사랑할 수 없으되 사랑하자라는 참어머님의 말씀으로 배반의 아픔을 치유하고 용서할 수없는 것조차 용서할 때 진정한 흥함의 역사가  가능한 것이다.

병오.  삼월 십칠일.  평해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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