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없는 볼편
정굉일 시집


은지야 미안하다
찬바람이 욕지거리를 바가지로 쏟아내는
횡단보도 신호등 앞
할머니의 손을 꽉 쥔 많이 아파 보이는 소녀
그녀의 입에서 날아오는 말 펀치
야 ! 파란불이다 은지가 안심하고 건널 파란불이다 세상은 참 좋다 은지가 안심하고 건널 신호등이 있으니까
할머니, 이렇게 좋은 세상을 만들어 놓고
왜 사람들은 은지를 아프게 할까 ?
타격당한 가슴이 아려온다 네가 만난 그 소녀의 말처럼 세상은 참 좋은 곳인데, 차~암 살기 좋은데
왜, 누군가는 상대를 아프게 하고
왜, 누군가는 그로 인해 아파 야 하는 걸까 ?
구석구석 끊임없이 가해지는 무차별 폭력
속수무책임 바람만 보는 실종된 사회정의
희망의 메시지 가득 담은 봄은 과연 올 것인가
은지야, 미안하다!
내가 어른이라서 미안하고 너희 같은 귀한 마음을 지켜주지 못해 더 미안하다
p94
2026년 1월 3일 독서